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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 이상과 현실의 간극

[울란바토르=AP/뉴시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9월 3일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의 스텝 아레나 경기장에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도착하는 동안 가톨릭 신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2023.11.12. [로마= AP/뉴시스] 차미례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은 11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미국 텍사스주 타일러 교구의 논란이 많은 극우 보수파 주교인 조세프 스트릭랜드 주교의 해임을 발표했다. 이유는 그가 트럼프의 1.21 국회의사당 난입교사를 지지하는 등 그 동안 미국 가톨릭계의 분렬과 대립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평화의 기도는 많은 가톨릭 신자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는 중요한 기도입니다. 하지만 이 기도의 배경과 그 의미를 깊이 살펴보면, 현대 사회의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도 존재합니다. 오늘은 평화의 기도가 갖는 잠재적인 문제점을 다뤄보려 합니다.

평화의 기도 전문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평화의 기도 심층 분석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이 문구는 개인이 평화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평화를 이루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중세 시기의 십자군 전쟁을 예로 들면, 가톨릭 교회는 평화보다는 폭력과 전쟁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이는 교회의 평화 추구가 겉치레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며, 개인에게 평화의 도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교회의 위선을 드러내는 일일 수 있습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이 문구는 매우 이상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종교 재판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박해했습니다. '진리'와 '믿음'이라는 이름 아래 다수의 사람들을 잔혹하게 다룬 것은 교회가 미움과 다툼을 조장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역사적 행보와 모순되며,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주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오,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 문구는 자기희생과 이타주의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는 피해자에게 부당한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동안 교회는 부패와 권력 남용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겼습니다. 교황청의 부패와 사치스러운 생활은 신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고, 이는 종교 개혁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이해와 사랑을 강요하는 것은 교회의 과오를 은폐하려는 시도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이 문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서 실천하기 어려운 이상주의입니다. 특히 용서함으로써 용서받는다는 개념은 피해자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역사적으로 면죄부 판매를 통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많은 이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었습니다. 이는 평화의 기도의 메시지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교회의 부패와 상업화를 보여줍니다.

결론

평화의 기도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지만, 그 이면에는 모순이 존재합니다. 이상주의적 접근, 개인의 책임 강조,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불균형, 종교적 맥락의 한계 등은 이 기도의 실천에 있어 현실적인 오류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가톨릭이 좋은 말로 눈속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평화의 기도가 진정한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이면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